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문단 편집) == 평가 ==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한 편이었다. 다만 무모할정도의 대담함과 선두에 서서 무쌍을 찍는 용맹함이 '군단장'까지는 더할 나위 없는 인물이었지만, 모든 상황을 냉정히 아울러야 하는 '총사령관'으로서는 단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대한 지나친 평가 절하라고 할 수도 있다.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인 만큼 해외 및 국내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혈질적인 군사광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기록 상으로 보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도 꽤나 절묘하다고 할 만한 정치적 수완을 여러 번 발휘했다. 물론 '황제의 덕목'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의 안목은 정확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카이사르 대에 시작되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실체화된 로마 제정의 황제 자리는 현대 한국인들이 익숙할 중국의 중앙 집권적 황제와 달리 시민 중 1인자라는 권위 위에 거부권이 포함된 호민관 특권과 군 지휘권 및 군의 지지, 비옥한 식량 창고인 이집트 속주의 지배권을 바탕으로 수도 로마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만한 경제력 등이 복합된 이질적인 최고 권력이었다.] 다음은 안토니우스가 싸움밖에 모르는 호전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다음 레피두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진입했을 때, 오히려 레피두스를 말리고 카이사르파와 원로원파의 화친을 주선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카이사르 군대에 패배해서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한 다음 레피두스의 군대와 합류해서 전황이 유리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원로원과 화친을 맺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 상황을 보면 안토니우스는 될 수 있으면 카이사르파 원로원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대화로 풀어나갈려고 했지 무력을 사용한 건 오로지 원로원이 그가 원했던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이 되는 걸 반대했을 때뿐이다. 그조차도 원로원을 상대로 직접 칼을 휘두른게 아니라, 총독 자리를 주는 것을 거부한 암살자 브루투스를 상대로 했다. *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보좌관으로 암살 직전까지 신뢰받았으며, 카이사르의 장례식에 참석한 로마인들을 연설 하나로 오열에 빠뜨리고[* 다만 안토니우스의 웅변으로 알려진 카이사르의 장례식 연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출전이다.] 암살자들을 도망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달변가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집정관인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로마에서 쫓아낸 것이다. 당시 로마 내에서 암살자들과 키케로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해줄 사병화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에 그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최후의 승자가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이기에 저평가되는 점이기도 하지만 2차 삼두정치 결성 역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안목이 아주 허술했다고 볼 수는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카이사르 사망 당시 18세에 불과한 풋내기가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오랫동안 카이사르 밑에서 종군하면서 군사적 업적을 쌓은 안토니우스의 심사를 충분히 뒤틀 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음으로써 수도 로마에 앉아 국가 정통성이란 명분을 손에 쥐고 힘을 모으고 있던 원로원파들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삼두의 영역 분할에서도 당대 헬레니즘 문화와 부의 중심지였던 동방 속주를 손에 넣어 훗날 옥타비아누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격파하고 레피두스 휘하의 군을 흡수하기 전까지 삼두 중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다만 먼저 옥타비아누스가 손을 내민 걸 잡았기 때문이지 당시 안토니우스는 손을 먼저 내밀 만한 처지도, 옥타비아누스의 손을 거절할 처지도 아니었다. 이미 로마에서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받았기 때문. 그런데도 삼두 중 독보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났고 가장 부유한 동방을 차지하고 로마 본토의 일에서는 손을 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결국에는 몰락하게 된 이유 역시 정치적 실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실수들이었다. 군사적 재능이 상당히 빈약해서 전투 국면에서는 평민 출신의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아그리파]]에게 의존했던 옥타비아누스와 달리 안토니우스는 일찍이 카이사르 휘하에서 군사적 역량을 인정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군 지휘관이었고 최후의 결전으로 회자되는 [[악티움 해전]] 직후까지도 안토니우스의 지상 전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전력보다 우세했다.[* 거기다 이 시점에서 그 아그리파마저도 군사적 능력으로는 안토니우스를 완전히 따라잡진 못했다.] 안토니우스 본인은 악티움 해전의 패전이 자신과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구도에 약간의 균열을 만들었을 뿐이고, 이 정도의 기울어짐은 자신의 군사적 우세로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만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자폭은 그 균열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켰고 결국엔 안토니우스가 가지고 있던 이점을 순식간에 모조리 꺾어버리게 된다. * 이탈리아 본토와 수도 로마에서의 지지 기반 확보에 지극히도 소홀했다. 삼두의 영토 나눠먹기 이후 안토니우스는 동방으로 떠났지만 원로원파를 절단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그의 아내 풀비아는 로마에 남아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들을 결집하여 반 옥타비아누스 활동을 주도했고 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상당한 압박이 되었다. 결국 이는 옥타비아누스와 그에 대항하여 풀비아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가 이끄는 이탈리아 내 안토니우스 지지 세력 간의 내전으로 번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안토니우스는 이를 지원하지 않고 방관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반격으로 안토니우스 지지파들은 진압되고 풀비아는 자살한다.[* 반면 카이사르는 로마 밖에 있을 때도 로마 안의 정쟁에 결코 무심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차 삼두정치 때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발생하자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눌러앉아 있었는데도 이들을 화해하도록 주선했고 또 갈리아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로마의 동향과 집정관 선거를 위한 표 다지기를 위해 미리 안토니우스(이 문서의 주인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본인 맞다.) 등을 전역시켜 호민관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도록 공작했다.][* 사실 풀비아는 생각보다 정치적 상징성이라는 면에서 그 카이사르에 필적할 정도였는데, 왜냐하면 풀비아는 바로 민중파의 효시인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 자손(외손녀)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전남편들이었던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였는데 이들은 둘 다 민중파에서 카이사르 다음가는 젊은 거물급 정치가가 되었는데 이는 풀비아의 영향이 컸다. 즉, 그라쿠스 형제의 직계 자손과 카이사르 휘하 최고의 장군이 손을 잡은 것이니 원래는 명분과 실력의 결합이었겠지만 정작 안토니우스는 동방에 눌러앉아 이를 쌩깠다.] * 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여 카이사르의 정당한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손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삼두의 영토 분할 이후 사실상 정적이 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대를 방관했다. 도리어 옥타비아누스가 지중해의 제해권과 그를 바탕으로 한 수도 로마의 식량 공급줄을 손에 쥐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대립할 때 120척에 달하는 선단을 지원하기까지 한다.[* 이는 향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날 때 2만의 로마 군단병을 지원하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약속을 믿고 보낸 지원이었지만, 정작 섹스투스를 제압하고 난 뒤 안토니우스가 약속의 이행을 요구했을 때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약속의 10분의 1에 불과한 2천 명의 군단병을 보낸 뒤 입을 씻는 것으로 화답한다.] 상술한 풀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내전 역시 안토니우스가 휘하 병력과 함께 신속히 이탈리아로 움직일 마음만 먹었다면 옥타비아누스를 끝장낼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로마 제정으로 가는 분수령이 된 악티움 해전에서조차 적전 도주를 한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백중세의 전황에 놓인 부하들을 외면하고 전장에서 이탈함으로써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를 방관한다.[* 사실 2차 삼두정치에서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하면서 동방의 안토니우스와의 관계를 중재할 역할은 옥타비아누스와 같이 서방을 맡은 레피두스의 몫이었다. 하지만 레피두스 휘하의 군대가 어이없게도 자신을 따르라는 옥타비아누스의 한마디에 일제히 배반하여 옥타비아누스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레피두스 역시 너무도 간단히 항복했기에 이 견제 장치는 작동할 수 없었고 삼두는 붕괴된다. 레피두스가 이끌고 있던 군단이 카이사르 생전 카이사르 휘하에서 사실상 사병화된 군대였으며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이 카이사르의 정당한 유산 상속자임을 줄기차게 내세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군단의 배신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이는 안토니우스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죄다 탈영하여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투항하면서 완전히 와해되었다.] * 로마의 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행사인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루는 것도 모자라서 그 영광의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여왕이 낳은 아이들에게 로마와 그 속주의 통치권을 나누어주겠다는 공개 선언을 한 것은 동시대의 로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자살 행위에 가깝다[* 동시대의 로마인 뿐 아니라 시대에 상관없이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다. 타국 군주에게 자국인들의 역량으로 확보한 영토를 분할한다는 발상은 그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죽거든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손에 넣어 공개함으로써 불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당시 로마 법에 저촉되는 행위였고, 야비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파렴치한 짓이었지만 당대 전쟁 영웅이자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이 심정적으로 나라에 등을 돌렸다는 충격적인 내용은 옥타비아누스의 불법적인 행동 따위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게 만들 정도의 파급력이 있었다.[* 이게 얼마나 당시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행동이었냐 하면, 약 100여 년 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가 유대 공주 베레니케와 혼인을 하려고 하자 로마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하며 경기장에서 일제히 야유를 터뜨렸고, 그로 인해 티투스는 결혼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100년이 지나도 전혀 사그러들지 않았던 충격이었던 셈.]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의 내전 동안 안토니우스를 애송이로 여기며 그 능력을 얕보았다고 전해진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상대로 지구전을 구사하며 싸우지 않고 있을 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했고, 카이사르는 번번이 이를 막으러 달려왔다. 당시 폼페이우스 입장에서 애송이가 아닌 장군이 몇이나 있었겠냐만. 결론은 능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필이면 상대가 [[옥타비아누스]]였다는 것이다. 사실 안토니우스의 가장 큰 문제는 카이사르 사후 혼란해진 로마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삼두정 시절 중요한 이탈리아 정세는 죄다 자기보다 나이도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미뤄놓고 자기는 부유한 동방에서 탱자탱자 놀기만 했고 그 옥타비아누스가 위기를 넘기고 세력을 확대해도 그러든가 말든가 방치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옥타비아누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없었더라도 과연 그 혼자서 로마를 다스리고 옥타비아누스처럼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옥타비아누스는 가장 까다로웠던 전역병의 보상 문제를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 황제 직할령을 건설하고 거기서 나오는 밀을 전역병들에게 퇴직금으로 나눠줌으로써 해결하였고 이를 아예 법으로 못박아놨다. 이로 인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역병의 퇴직금 지급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